친명 좌장 정성호의 이중플레이? 정진상·김용 ‘특별면회’ 유감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과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것을 어떻게 지혜롭게 양립시킬 수 있는지 하나하나 만만치 않은 과제들이다.
되돌아보면 그는 명실상부한 ‘한류(K-Wave)의 선구자였다.서울시립미술관이 2017년 3월 개관한 창신동 백남준기념관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2004년 어느 인터뷰 장면에서 백남준(1932~2006) 선생이 생전에 했던 이 말이다.
한국전쟁을 치르며 건물 대부분이 파손됐으나.두말할 나위 없이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한국에 상륙한 이래 그는 광주비엔날레 창설(1995).
백남준기념관은 3000평 넘는 터에 우뚝 솟은 솟을대문이 있어 ‘큰대문집으로 불리던 창신동 옛집 터에 마련됐다.우리는 유명인이 태어났거나 잠시 살았거나 학교에 다녔거나 하는 연고를 십분 살려 미술관이나 기념관을 짓고 마을 브랜드로 키워가는 사례를 목격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열악한 전시 환경과 관람객 저조가 기념관의 문을 닫는 이유가 된다면 아픈 사람은 병을 고치기 전에 죽어야 한다는 궤변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한국의 문화적 자산이라는 점이다.이래저래 어물쩍 넘어갈 상황이 아닌 건 분명하다.
유권자들은 또 찍을 것이다.우리 유권자들은 독하다.
여차하면 뛰쳐나갈 이들이 대기 중이다.이제 안녕!이라고 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받아쳤다.